- 전국 최대 잣 주산지 명성 흔들…2014년 2,205t→2023년 24t, 불과 1.1%
- 한때 전국 생산량 58.6% 차지했던 가평…잣 생산기반 자체가 붕괴
- 엎친 데 덮친 재선충병…가평 피해 고사목 5,246그루, 최근 방제 대상목도 전년보다 5.2배 증가
- 소나무허리노린재·기후변화에 재선충까지…“병해충 방제 넘어 잣 산업 살릴 종합대책 세워야”
잣나무재선충병의 진짜 문제는 산에서 나무 몇 그루가 말라 죽는 데 있지 않다. 전국 최대 잣 주산지로 이름을 날렸던 ‘가평 잣’의 생산기반 자체가 무너지고 있다는 데 있다.
본보가 최근 가평지역 재선충병 현장을 확인한 결과 곳곳의 잣나무 숲에서 고사목이 빠르게 늘고 있다. 푸른 잣나무 사이로 붉게 말라 죽은 나무들이 확산하면서 일부 산림은 육안으로도 피해를 확인할 수 있을 정도다. 문제는 이 같은 재선충 확산이 이미 심각한 수준으로 추락한 가평 잣 생산량 감소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가평군 등에 따르면 2014년 2,205t이던 가평 잣 생산량은 2023년 불과 24t으로 줄었다. 10년 전 생산량의 1.1%, 사실상 100분의 1 수준이다. 2010년에는 3,937t을 생산해 전국 생산량의 58.6%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가평은 전국 잣 생산량의 약 40%를 담당하는 대표적인 주산지로 꼽혀 왔다.
그러나 생산량은 2016년 3,865t에서 2017년 1,733t으로 줄더니 2018년 183t으로 곤두박질쳤다. 이후 2019년 125t, 2020년 220t, 2021년 82t, 2022년 335t을 기록했고 2023년에는 결국 24t까지 떨어졌다. ‘전국 최대 잣 생산지 가평’이라는 말 자체가 무색해질 정도다. 생산량 감소 원인은 하나가 아니다.
경기도 산림환경연구소는 2020년 외래 해충인 소나무허리노린재를 잣 생산량 감소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했다. 이 해충은 잣나무 솔방울의 내용물을 빨아먹어 종자 형성을 방해한다. 여기에 기후변화와 재선충병까지 겹쳤다. 재선충병은 매개충을 통해 재선충이 나무에 침입한 뒤 수분 이동 통로를 막아 나무를 고사시키는 치명적인 산림병해충이다. 잣나무 역시 감염 대상이다.
특히 올해 상황은 심상치 않다. 경기도가 지난 4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하반기부터 올해 4월 7일까지 확인된 가평군 재선충병 피해 고사목은 5,246그루에 달했다. 포천 3,237그루와 함께 두 지역에서만 경기도 전체 피해 고사목의 20%가 집중됐다. 이후 경기도가 집계한 지난해 6월부터 올해 5월까지 자료에서도 가평군의 재선충병 방제 대상목은 전년 같은 기간보다 5.2배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46호 경춘국도변 가평군 줄길리, 강 건너 마을 산이 붉게 물들었다. 단풍이 아니다.재선충에 병든 잣나무가 말라죽은 것이다.[사진/정연수 기자]
가평의 재선충 문제가 단순한 산림 관리 차원을 넘어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잣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게 하는 해충이 한쪽에서 생산량을 떨어뜨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재선충병이 잣나무 자체를 말려 죽이고 있는 구조다. 더 심각한 것은 생산기반이 이미 한계선까지 내려왔다는 점이다.
가평군 산림조합의 잣 가공·유통 현장에서는 지난해 수매 물량을 확보하지 못해 가동을 멈춘 상태다. 잣 농가 역시 생산량 감소가 계속되면서 폐업을 고민할 정도라는 증언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도 행정 대응이 생산량 감소 속도를 따라가고 있는지는 따져볼 문제다.
지난해 가평군의회 행정사무감사에서는 잣 생산량 급감에 대한 경기도나 산림청 차원의 원인 규명과 연구가 진행되고 있느냐는 질문에 군 산림부서가 당시 파악한 연구가 없다는 취지로 답변하기도 했다. 군의회에서는 단순히 상급기관에 건의하는 수준을 넘어 직접 대책 마련을 요구해야 한다는 지적까지 나왔다.
물론 가평군이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군은 2024년 소나무재선충병 긴급방제에 28억원을 투입했고, 경기도 역시 올해 도내 재선충병 대응에 140억원을 투입해 피해지역별 맞춤형 방제를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필요한 것은 ‘몇 그루를 베었느냐’는 방제 실적만이 아니다.
가평군은 지난 10여 년간 잣 생산량이 2천t대에서 24t까지 추락하는 동안 원인별 장기 조사와 생산량 회복계획은 무엇이었는지, 소나무허리노린재와 재선충병을 각각 따로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가평 잣 산업 보호’라는 하나의 목표 아래 통합 관리하는 계획이 있는지를 밝혀야 한다.
재선충 피해지역과 주요 잣 생산림의 중첩지역은 어디인지, 우량 잣나무림을 별도로 지정해 집중적으로 보호할 계획은 있는지, 예방나무주사와 감염목 제거·수종전환을 어떤 기준으로 적용하고 있는지도 공개할 필요가 있다.
농가 피해도 마찬가지다. 잣 생산량 감소로 실제 몇 농가가 생산을 포기했는지, 잣 채취·가공·유통업체의 매출과 종사자는 얼마나 감소했는지조차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다면 제대로 된 산업대책을 만들기 어렵다.
재선충병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감염된 나무를 제거하는 사후 방제만 반복하는 사이 잣나무 숲이 계속 사라진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가평 잣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가 아니라 ‘가평에 잣 산업이 남아 있는가’를 묻게 될 수 있다.
가평군이 자체적으로 작성한 2026년 스마트도시계획에서도 기후온난화와 재선충병 확산으로 고품질 잣 확보가 어려워지고 있으며 지역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진단했다.행정도 이미 문제를 알고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이제 필요한 것은 선언이 아니라 실행이다.
재선충병 방제와 소나무허리노린재 방제, 우량 잣나무림 보호, 기후변화 대응, 생산농가 지원, 가공·유통산업 보호를 하나로 묶은 ‘가평 잣 산업 회생 종합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전국 최대 잣 주산지라는 명성은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수십 년 동안 잣나무를 가꾸고 산을 오르내리며 잣을 따온 주민들과 농가가 만든 지역의 자산이다.

생산량은 이미 100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제 잣나무까지 재선충병으로 빠르게 죽어가고 있다. 그런데도 원인 규명과 방제, 농가 지원을 각각의 사업으로 쪼개 대응한다면 가평의 대표 특산품을 지키기에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다. 지금 가평의 산에서 말라 죽어가는 것은 잣나무 한 그루가 아니다.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면 전국 최대 잣 주산지라는 가평의 명성과 지역 산업 기반까지 함께 사라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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