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불교법사회 자광사 주지 진수 스님의 기고문 '행간'

대한불교법사회 자광사 주지 진수 스님
법은 누구에게나 공정해야 한다.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공적을 세웠다는 이유로 법의 심판을 피해서도 안 되며, 고령이라는 이유만으로 책임이 사라져서도 안 된다. 그러나 법의 엄정함이 곧 인간에 대한 냉혹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법치국가의 품격은 가장 엄중한 순간에도 인간의 존엄과 기본권을 얼마나 세심하게 지켜내느냐에 달려 있다.
대한불교법사회 자광사 주지 진수 스님이 최근 기고문을 통해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 총회장이자 HWPL 대표인 이만희 씨에 대한 인도주의적 사법 판단을 호소했다.
이 글은 특정 종교의 교리를 옹호하거나 재판의 결론에 영향을 미치려는 주장으로만 볼 일이 아니다. 초고령 피고인을 대하는 우리 사법제도의 자세와 국가의 품격을 걱정하는 충정에서 나온 문제 제기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이 씨를 둘러싼 각종 법적·사회적 논란은 재판 과정에서 증거와 법리에 따라 엄정하게 판단돼야 한다. 공적 활동이나 과거의 이력이 혐의에 대한 면책 사유가 될 수는 없다. 유무죄 판단은 여론도, 종교도, 정치적 이해관계도 아닌 오직 법과 증거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
다만 형사재판의 목적은 피고인에게 고통을 주는 데 있지 않다. 실체적 진실을 밝히고 죄가 있다면 그에 합당한 책임을 묻는 데 있다. 구속 역시 처벌을 미리 집행하는 수단이 아니라 도주와 증거인멸을 막고 재판 절차를 확보하기 위한 예외적인 제도다. 따라서 구속 여부는 혐의의 중대성만이 아니라 연령과 건강 상태, 주거의 안정성, 도주 가능성, 증거인멸 우려 등을 종합해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특히 만 95세의 초고령자라면 건강과 생명에 미칠 영향을 가볍게 볼 수 없다. 재판은 계속하되 의료적 관리와 방어권이 충분히 보장되는 상태에서 심리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법의 후퇴는 아니다. 오히려 무죄 추정과 불구속 재판의 원칙, 인간의 존엄을 함께 지키는 성숙한 법치주의의 모습이다.
이 씨가 6·25전쟁 참전용사라는 점도 우리 사회가 외면해서는 안 될 부분이다. 참전 경력이 현재의 혐의를 없애주는 방패가 될 수는 없지만, 국가를 위해 전장에 섰던 한 인간의 삶까지 송두리째 부정할 이유도 없다. 법적 책임과 국가유공자에 대한 예우는 구분해 판단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
HWPL을 통한 국제 평화운동 역시 마찬가지다. 그 활동에 대한 평가가 엇갈릴 수는 있지만, 국내외에서 이어온 평화 활동과 민간외교의 궤적까지 재판 이전에 모두 부정하거나 조롱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혐의는 혐의대로 판단하고 공적은 공적대로 평가하는 것이 공정하다. 공정은 한쪽의 사실만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삶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는 데서 출발한다.
우리 사회는 언제부터인가 상대를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 인간의 모든 생애와 존재까지 부정하려는 극단적 풍토에 익숙해지고 있다. 그러나 사법부만큼은 여론의 분노나 종교적 호불호, 정치적 이해관계로부터 거리를 둬야 한다. 가장 불리한 위치에 놓인 피고인에게도 법이 정한 권리와 인간적 예우를 보장할 때 사법 정의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 굳건해진다.
이번 호소를 단순한 ‘선처 요구’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그 안에는 우리 국가와 사법제도가 법의 이름으로 인간의 존엄을 훼손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깊은 우려가 담겨 있다. 법이 차갑기만 하면 공포가 되고, 인정만 앞세우면 원칙이 무너진다. 법과 정의, 원칙과 긍휼이 함께할 때 비로소 국민이 신뢰하는 사법이 완성된다.
재판부는 외부의 압력이나 감정에 흔들리지 말고 법과 증거에 따라 엄정하게 심리해야 한다. 동시에 피고인의 초고령과 건강 상태, 참전 경력, 사회적 기반과 방어권 보장 가능성도 충분히 살펴야 한다. 불구속 재판이 가능한 조건이라면 이를 진지하게 검토하고, 구속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한다면 그 필요성과 상당성을 국민이 납득할 수 있도록 분명히 밝혀야 한다.
나라를 걱정하는 충정은 법을 무너뜨리자는 데 있지 않다. 법이 더욱 정의롭고 사법이 더욱 인간적이기를 바라는 데 있다. 대한민국 사법부가 원칙의 엄정함과 인간에 대한 예우를 함께 지켜냄으로써, 법치주의의 성숙함과 국가의 품격을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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