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곡에 발을 담그니, 세상이 멈췄다”
봄을 제촉하는 비가 북한강 수면을 두드리던 날이었다. 강은 말이 없었고, 바람은 유난히 차가웠다. 물안개가 낮게 깔린 강가에서 그녀는 검은 우산을 가볍게 쥔 채 서 있었다. 누군가의 삶을 오래 품어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한 침묵. 그리고 그 침묵을 뚫고 나오는 힘찬 목소리.

기자는 그날, “가평의 노래”를 만나러 간 것이 아니었다. 사실은… 한 사람의 시간을 만나러 갔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상했다. 밝고 힘이 있는데, 끝자락에 늘 젖은 것이 매달려 있었다. 마치 웃음을 삼키며 노래하는 사람처럼. 마치 “괜찮다”는 말 속에 “괜찮지 않다”가 숨 쉬는 사람처럼.
“고향이요? 영덕이에요. 영덕. 강구도 있고… 바다는 좀 떨어져 있어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바람이 우산 끝을 툭 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오래된 사진처럼 어딘가 바랬다. 그녀의 어린 시절에는 노래가 있었다. 막걸리 문화가 남아 있던 경상도 마을. 손님이 오면 어머니는 늘 딸을 불렀다.
“우리 딸, 노래 잘한다.” 그렇게 ‘비 내리는 호남선’을, 목이 메는 가사를, 어린 목소리로 부르게 했고, 그 순간 어머니는 잠깐이라도 세상이 덜 고단한 사람처럼 웃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 웃음이, 그녀가 평생 붙들고 살아온 첫 번째 불빛이었다.
그런데 세상은, 노래를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딴따라”라는 말이 꿈을 칼처럼 자르던 시절,보수적인 아버지의 눈빛은 노래를 ‘재능’이 아니라 ‘금지’로 만들었다. 그녀는 스스로 노래를 접었다. 재능은 그렇게, 서랍 속에 눌러 담겼다. 하지만 기억은, 눌러 담아도 새어 나오는 법이었다.
그녀가 다시 노래의 문턱에 선 것은 빛이 아니라 추락 때문이었다. 용산전자상가. 컴퓨터 산업의 열기가 뜨겁던 시간. 그곳에서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사업을 했다. 남편을 공부시키기 위해, 남편의 길을 끝까지 밀어주기 위해 자신의 하루를 환전하듯 바꿔가며 일했다.
그러던 1993년, 업계는 무너졌고, 부도는 삶의 문을 걷어찼다. 그리고 한 달 만에—어머니가 떠났다. “장례를 제대로 못 치렀어요.” 그 한 문장이 강가의 비처럼 오래 떨어졌다. 그녀의 말은 담담했지만, 담담함은 종종 가장 깊은 울음이다.
채권자가 장례식장까지 쫓아오던 날, 그녀는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키면서도 어머니 곁을 떠나야 했다. 삶이 사람을 몰아붙일 때, 사람은 죄인이 된 것처럼 도망치게 된다. 그 죄책감이, 어머니의 부재가, 그녀의 가슴속에 커다란 빈 공간을 남겼다.

그 빈 공간은 시간이 지나도 채워지지 않았다. 그저 울림이 되어 남았다. 그리고 1년 뒤, 또 하나의 벼락. 남편의 죽음. 공군 중령 진급과 박사과정 수료를 앞둔 해. 그는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그때를 “세상이 싫었다”고 말했다. 세상이 싫어지는 순간은, 대개 세상이 너무 사랑했던 것을 빼앗아 갔을 때다. 상복을 입고 화장실에서 밥을 먹으며 당장 막지 않으면 끝장나는 것들을 막아내던 시간. 그 시간 속에서 그녀는 삶이라는 전쟁터를 혼자서 버텼다. 그녀는 울지 않았을 것이다. 울기엔 너무 바빴을 것이다. 울기엔 너무 많이 잃었을 것이다. 울음은, 살아남은 뒤에야 찾아오니까.
가평은 그렇게 찾아왔다. 인연도, 계획도 없이. 사기당한 땅 문제를 해결하러 왔다가 계곡에 발을 담그고…그녀는 말한다. “아무 생각이 안 났어요.” 그 말은 이상하게도 절망이 아니라 구원처럼 들렸다. 아무 생각이 안 난다는 건, 살아있다는 뜻이었고 숨이 돌아왔다는 뜻이었고 또 하루를 견딜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그 순간 결심했을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이 쉬어갈 곳을 만들자. 한 많은 사람이 잠깐이라도 세상을 잊을 곳을. 그 결심은 ‘하이랜드’가 되었고, 하이랜드는 다시 그녀를 시험했다. 사기, 중단, 경매, 또 경매. 손에 쥔 돈은 모래처럼 빠져나갔다.
가장 아픈 장면은, 중학교 2학년 아들이 혼자 있는 집에 집달리가 와 짐을 밖으로 다 꺼내던 날이었다. 그 짐 속에는 남편의 유품이, 결혼사진이, 아이의 시간들이 들어 있었다. 기간이 지나자 짐은 처분됐다.
세상은 그렇게 추억을 ‘물건’ 취급했다. 그 순간부터 그녀의 마음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집을 잃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다시 일어섰다. 용산으로 돌아가 대리점을 열고 낮에는 상담하고, 밤에는 납품했다. 무거운 모니터를 들고 5층을 오르내렸다. 그 노동은 단지 돈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도망갔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한 싸움이었다.
그녀는 도망치지 않았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다시 서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리고, 2018년. “끝났다”고 믿었던 날들 한가운데서 기적처럼 다시 살아났다. 경매가 낙찰됐는데도 잔금이 들어오지 않아 그녀는 다시 가평에 남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 노래가 돌아왔다. 누군가가 말했다. “이 목소리로 노래 안 하면 국가적인 손실이야.” 농담처럼 들렸을지 몰라도 그 말은 그녀에게, ‘살아남은 이유’를 건네는 문장 같았을 것이다.
그녀는 늦깎이로 무대에 섰다. ‘남이섬 연가’를 부르고, ‘가평여인’을 부르고, 세상에 자신을 내놓았다. “목소리에 한이 있대요.” 그 한은 어머니에게 못 지킨 마지막, 남편이 남긴 빈자리, 아들에게 남긴 미안함, 그리고 매번 다시 일어나야 했던 삶의 흉터들.
그 모든 것이 목소리에 눌어붙어 있었다. 강가에서 그녀의 말이 끝나자 비는 조금 잦아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의 공기는 더 촉촉해졌다.
봄은 늘, 누군가의 겨울을 통과해 온다. 그녀의 봄도 그렇다. 그녀의 봄은 노래라는 형태로 늦게 도착했고 그 늦음은 오히려 더 진했다. “이 나이에 뜨겠다는 게 아니라…목소리 하나는 남기고 싶어요.” 그 말은 욕심이 아니라 기도처럼 들렸다.
세상이 너무 많이 빼앗아 간 사람은 결국 하나라도 남기려 한다. 그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기를 바라면서. 그녀는 오늘도 부른다. 북한강 바람을 지나, 계곡의 물소리를 지나, 가평의 겨울을 지나 자신의 목소리 끝에 매달린 한을 노래라는 이름으로 조심스럽게 세상에 내려놓는다.
그리고 그날, 기자는 알았다. 그녀가 부르는 것은 트로트가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의 서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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